김초엽 작가의 베스트셀러 소설집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의 수록작 중 최초로 영상화된 감성 SF 애니메이션, 영화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가 관객들을 찾았다. 3일 CGV 영등포 타임스퀘어에서 마련된 이번 GV에는 연출을 맡은 허평강 감독과 목소리 연기로 캐릭터에 생명력을 불어넣은 배우 김향기(소피 역), 박지후(데이지 역), 이주영(올리브 역), 그리고 이은선 영화 저널리스트가 참여해 작품의 깊이 있는 제작 비하인드를 공유했다.
원작 소설이 데이지가 소피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인 서간체로 구성된 것과 다르게 애니메이션은 소피를 전면적인 주인공으로 내세우며 관점의 변화를 시도했다. 허평강 감독은 원작의 편지 형식을 그대로 영상화하면 나레이션 중심의 객관적인 필름이 되기 쉽다고 판단했으며 관객들이 더 주관적으로 몰입해 이야기를 따라가게 만들기 위해 독자의 역할을 하던 소피를 극 중심부로 배치했다고 연출 의도를 밝혔다. 특히 마지막 장면에 소피와 데이지가 마주하는 설정을 각색 초기 단계부터 확정 지었다고 설명했다.


배우들 역시 실사 영화와 차별화되는 애니메이션 장르만의 독창적인 매력을 언급했다. 소피 역의 김향기 배우는 소설로 접했을 때는 데이지의 시점으로만 상상하게 되던 이야기가 영상화 과정을 거치고 서사가 확장되면서 개별 캐릭터 모두에게 시선이 머무는 이점이 생겼다고 말하며 작품에 맞춰 정교하게 조율된 사운드가 관객의 감정을 끌어올리는 역할을 수행한다고 덧붙였다.
데이지 역의 박지후 배우는 머릿속으로 상상하던 우주나 세계관을 시각적 한계 없이 광범위하게 구현할 수 있다는 점을 짚었으며 신체적 표현이 배제된 채 캐릭터의 목소리만으로 소중한 대사를 전달하기에 관객이 텍스트의 본질에 밀도 높게 집중할 수 있다고 전했다. 올리브 역의 이주영 배우는 원작 소설집의 여러 단편 중 본 작품이 실사 영화 개발 속도보다 기민하게 작업되어 관객들과 이른 시점에 조우할 수 있었던 점을 애니메이션 장르의 강점으로 꼽았다.
상대 배우 없이 마이크 앞에 홀로 서야 하는 더빙 과정은 베테랑 배우들에게도 새로운 연구 과제였다. 녹음 순서와 당시 각자가 지녔던 연기 성향에 따라 치열한 고민이 이어졌다. 이주영 배우는 촬영 종료 후 기존 음향과 연기 결을 맞추는 일반적인 후시 녹음과 다르게 백지상태에서 오직 음성만으로 인물에 입체감을 부여해야 했기에 준비 과정에서 부담감이 존재했으나 현장에서 연출자가 정밀한 디렉션으로 방향성을 제시해 준 덕분에 신뢰를 갖고 임할 수 있었다고 소회를 밝혔다.
전체 배역 중 가장 먼저 녹음을 진행한 박지후 배우는 고독한 부스 안에서 홀로 대사를 소화하며 다른 배우들의 발성 톤을 유추해야 하는 막막함이 있었지만 호흡의 미세한 변화나 어미의 고저에 따라 인물의 성격이 완전히 달라지는 연기적 변주를 경험하며 표현의 자유로움을 만끽했다고 설명했다.


김향기 배우는 먼저 완성된 박지후 배우의 음성을 청취하며 교감하는 장면에 큰 도움을 받았다고 고마움을 전하면서도 당시 다른 작품에서 거칠고 반항적인 인물을 연기하던 도중 소피의 차분한 톤을 표현해야 했기에 사운드 체크 과정에서 연출자와 대사 어미를 정밀하게 수정해 나갔던 일화를 소개했다. 특히 신체 동작이 제한된 조건에서 감정을 전달하는 성우들의 예술적 깊이를 체감했으며 소피가 심리적 갈등을 겪을 때 새어 나오는 호흡 표현을 반복적으로 연마했다고 털어놓았다.
허평강 감독은 캐스팅 단계에서 외형적 조건이 아닌 인물이 자아내는 독특한 기류와 언어 사이의 공백을 중심 지표로 삼았다고 피력했다. 등장인물들의 음색이 유사할 경우 관객의 몰입을 저해할 수 있어 세 배우의 청각적 대조를 명확히 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원작에서 묘사가 미진했던 소피 역을 구상할 때는 시나리오 집필 단계부터 영감을 줄 대상이 필요했고, 드라마 '열여덟의 순간' 등에서 올곧고 강인한 에너지를 보여준 김향기 배우를 떠올리며 캐스팅을 제안했다. 소피는 기성 세대의 규칙을 충실히 따르는 우등생에서 세계의 수수께끼를 직면하고 용기 있게 전진하는 등 극 중 가장 입체적인 심리 변화를 겪는 인물이다.
데이지 역의 박지후 배우는 영화 '벌새'에서 보여준 나이 대비 성숙하고 명민한 기질이 발탁 배경이 되었으며 별도의 가이드 음성이 없는 척박한 환경에서도 보이시한 톤과 발랄한 버전 등 다채로운 해석을 독자적으로 준비해 와 연출진을 매료시켰다. 올리브 역의 이주영 배우는 영화 '야구소녀', '메기'에서 보여준 독보적인 리더십과 어른스러운 면모가 캐스팅의 확신을 주었으며 방황하는 두 소녀의 서사를 단단하게 지탱하는 축 역할을 훌륭히 완수했다.
시각적 세계관을 구축하는 공간 디자인 역시 치밀한 대비를 이룬다. 고통이 부재하는 가상의 유토피아 행성은 시각적인 안정을 주는 붉은색 위주의 난색조로 구현되었으나 창조주 릴리가 설계한 인공적 공간이라는 이면을 드러내기 위해 초목이 배제된 황량한 돌 지형으로 설정되었다. 이는 허 감독이 과거 튀르키예 카파도키아 여행에서 목격한 외계 행성 같은 지형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결과다.
이와 대조적으로 순례자들이 당도하는 지구 이타사는 푸른색 중심의 한색조로 연출되었다. 고도의 기술로 재편된 '개조 구역'은 극대화된 미감으로 아름답게 묘사되어 도리어 그 공간이 내포한 차가운 차별의 정서를 부각하며 소외된 '비개조 구역'은 첫 여행지가 주는 설렘을 투영하기 위해 개조된 전철 내부 바나 길고양이, 거리의 악사들을 배치해 생동감 넘치는 공간으로 완성되었다. 허 감독은 디지털의 차가움이 강조되는 과학 소설 세계관보다 '원더풀 데이즈'나 '전뇌 코일'처럼 과거의 향수와 따스함이 공존하는 SF 아트를 지향한다고 덧붙였다.
원작이 소피와 데이지의 재회 직전 고조되는 기대감 속에서 서정적인 여운을 남기며 마무리되는 것과 달리 이번 영화는 두 인물의 만남을 명확히 명시하는 해피엔딩을 채택했다. 허평강 감독은 현대 사회에서 타인에게 진심을 고백하고 마음을 전달하는 행위 자체가 고백 공격이라는 신조어가 생길 만큼 두려운 일이 되었다는 점에 주목했다. 내면에 뜨거운 불꽃을 감춘 정적인 인물이 스스로 축적한 용기를 발휘해 앞으로 달려 나갈 때 관객에게 전해지는 정서적 해방감과 격려의 메시지가 존재한다고 믿었기에 구조적인 완결성을 택했다고 설명했다.

관객들이 아쉬움을 표한 60분이라는 짧은 상영 시간에 대해서는 제작 여건에 따른 현실적인 타협안이었음을 고백했다. 본래 단편 소설의 분량을 고려해 30분 내외의 중단편으로 기획되었으나 우주적 세계관과 다세대에 걸친 역사적 개념을 설명하는 데만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어 서사를 유지하기 위해 영진위 지원을 받아 분량을 점진적으로 확대했다. 외부 자본 없이 순수 자체 투자와 공공 지원금만으로 운용되는 독립 애니메이션의 특성상 예산 범위 안에서 도출할 수 있었던 최대치가 60분이었다는 설명이다. 감독은 향후 기회가 주어진다면 옴니버스 형태의 TV 시리즈 확장을 통해 이번 극장판에서 축소되었던 창조주 릴리의 전사나 올리브와 델피의 깊이 있는 로맨스 서사를 온전히 복원하고 싶다는 포부를 전했다.
매끄럽게 통제된 완벽한 무균실을 벗어나 결함과 불안정함이 공존하는 현실의 숭고함을 역설하는 영화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는 잔인한 세계관 속에서도 사랑이라는 가치가 왜 수호되어야 하는지 증명해 내며 극장가에 깊은 감동의 발자국을 남기고 있다.
영상 : 영화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 GV [뮤즈온에어]
사진 : 영화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 GV [뮤즈온에어]

















